청소년소설에 나타난 기후 위기 시대와 재난의 삶: 홍수 속 ‘연대’의 의미
초록
이 논문에서는 기후 위기와 재난의 삶을 다루는 2020년대 청소년소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최근 청소년소설에서는 홍수로 인한 재난 상황에 대한 상상력이 자주 나타난다. 이 작품들은 기후 위기 문제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완전히 물에 잠겨 버린 서울의 삶을 상상하고, 극한의 상황에서 청소년 주체들의 적극적 실천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현재 가장 중요한 화두라고 할 수 있는 기후 위기 문제에 대해서 냉철한 인식과 성찰을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청소년소설 장르의 시의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청소년소설에서는 진지한 문제의식과 청소년 주체들의 당당한 대응 방식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의 연대 문제에 대하여 예리한 감각을 보여준다.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그것은 특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본고에서는 2020년대 이후 발표된 단요의 『다이브』(2022), 설재인의 『범람주의보』(2023), 장은진의 『디어 마이 버디』(2023) 등의 장편 청소년소설 작품들을 대상으로 홍수 속 연대의 의미와 양상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이 작품들은 모두 홍수로 물에 잠긴 세계에서 청소년 주체들의 고민과 선택에 대하여 성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과정에서 연대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이브』에서는 수십 년 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기계-인간 소녀 ‘수호’의 존재와 관련하여 새롭게 구성되는 청소년 연대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범람주의보』에서는 거대 자본에 의해 재난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 이면에 그러한 편리를 위해 희생된 약자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음이 나타난다. 『디어 마이 버디』에서는 물속에 잠긴 세계에서 비로소 강력한 책임감으로 서로를 지켜주는 연대가 형성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기후 위기로 인해 초래된 재난 상황에서, 작품 속 청소년들은 통제받고 억압받는 대상이 아니라 청소년 세대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의사 표현과 선택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구현된다.
Abstract
This paper examined youth novels from the 2020s that describe life under climate crisis and disaster risk. In recent youth novels, imaginations about flood situations appeared frequently. These works imagine life in Seoul completely submerged in water as the most representative form of the climate crisis, and show the active responses of youth subjects in extreme situations. This theme is timely, as it calls for a level-headed awareness and reflection on the climate crisis—one of the most pressing issues of our time.
Young adult novels that deal with the issue of climate crisis materialize young people's serious awareness of problems and confident response methods. In particular, they show a keen sense of the issue of solidarity among young people, which is revealed in a special form in extreme situations such as disasters. This paper analyzed the meaning and aspects of solidarity in flood situation described in full-length young adult novels published since the 2020s, which include Danyo's Dive, Seol Jaein's Flood Warning, and Jang Eunjin's Dear My Buddy. All of these works commonly reflect on the concerns and choices of young people in a world submerged in flood water. In this process, the awareness of solidarity has an important meaning.
Dive talks about the solidarity among adolescents, which was newly formed in relation to the existence of `Sooho', a machine-human girl who had been submerged in water for decades. Flood Warning depicts the socially disadvantaged who have been sacrificed for the convenience of those who think that disasters can be avoided by using huge capital. In Dear My Buddy, solidarity could be formed at last in a world submerged in water, where people protect each other with a strong sense of responsibility. In the midst of a climate crisis, the youngsters in these works are depicted as people who reveal the possibility of paying greater attention to the issues of the youth generation's lives and expressing their opinions, rather than being controlled and oppressed.
Keywords:
Young Adult Fiction, Climate Crisis, Disaster, Flood, Solidarity키워드:
청소년소설, 기후 위기, 재난, 홍수, 연대Ⅰ. 서 론
기후 위기 문제는 현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이며, 특히 청소년 후속 세대들에게도 지속적으로 환기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라 최근의 청소년소설에서는 점차 기후 위기로 초래된 재난의 현실과 관련한 삶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 주요하게 다루어지며,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들에서 이러한 주제 의식이 반복적으로 형상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인다.
전반적으로 21세기 한국소설에서는 재난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왔다. 2000년대 이후 파국, 종말, 묵시론 등의 요소들이 삽입된 재난 서사가 자본주의의 폐해나 비인간화 비판을 위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김미현, 2019). 청소년소설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다르지 않다. 특히 나날이 기후 위기와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1) 등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후속 세대의 삶을 위해 중요한 현안이라고 인식되는 이때, 이러한 문제를 중심으로 청소년 독자와 교감하는 것의 의미를 밝히고 이를 통해 미래 세대의 삶에 대해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같이 고민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2020년대에 발표된 청소년소설들을 대상으로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주체들의 삶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양상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한다.
청소년소설은 청소년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들의 고민과 갈등을 통한 성장의 과정을 형상화한 소설로, 청소년들을 주된 독자층으로 한다. 청소년 인물의 고민과 갈등을 통한 성장의 과정은 서사적 존재로서 자아 정체성의 형성과 깊은 연관을 맺는다. 고민과 갈등을 통해 청소년 인물들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확장된 인식을 통해 자아 성찰을 도모하기 때문이다(선주원, 2019).
그런데 기존의 청소년소설에 대한 인식과 연구에서는 주로 성장소설과 관련한 지점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측면이 있다. 이로 인해 사실상 청소년소설은 특정한 장르의 문학에 한정되어 있거나 대체적으로 유사한 경향성을 지향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물론 교육 자료로써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감안한다고 해도, 청소년소설 및 청소년 서사 관련 지점을 단지 성장소설로서만 기대하고 생산, 소비하며 분석한다는 것은 청소년소설의 발전 가능성을 오히려 제한하는 요인으로 기능하게 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청소년소설은 성장소설과 무엇이 다른가를(오세란, 2015) 고민하며 청소년소설의 다양한 가능성과 문제의식을 탐색하는 것은 청소년소설 연구에 있어 중요한 지점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청소년은 그들만의 고유한 특성과 문화를 가진 주체로 인식되었다. 현실적으로 한국 문단에서 문학의 소비자로서 책을 둘러싼 독자의 위상은 점차 중요하게 부각되어 왔다(박경희, 2017). 특히 청소년 독자의 위상과 주체성은 성인 독자 못지않게 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 청소년소설에 대한 기존의 접근 방식에 의지하며 계속하여 명랑성, 성장의 경쾌함 등만 강조한다면 청소년소설의 진정성에 대해 독자들은 결국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선행 연구들에서도 청소년소설과 성장소설의 관계성에 대해 주목해 왔다. 나병철(2011)은 청소년환상소설에서 성장의 의미와 통과제의적 성격을 밝혔다. 오세란(2010)은 청소년소설과 성장소설의 개념과 관계성을 명확히 함으로써 1990년대 이후 본격 활용된 청소년소설 용어의 의미에 대해 논했다. 나아가 이수진(2014)은 청소년문학에서 디스토피아적 전망을 발견하며 이것은 바로 권위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청소년소설 연구를 위해 성장소설과의 변별성을 전제로 하는 것뿐만 아니라 청소년소설 자체의 새로운 의제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숙고가 필요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청소년소설의 서사에서는 나름대로 진지한 문제의식과 청소년 주체들의 당당한 대응 방식을 구현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 사이의 연대 문제에 대하여 예리한 감각을 드러내고 있으며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그것은 특수한 형태로 나타난다. 본 연구에서는 그러한 연대의 관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피며 청소년소설의 분석을 진행하고자 한다. 이는 청소년소설의 형식이 보여줄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주체성, 저항성의 측면과도 연관되는 것이다. 사회의 기성세대인 어른들에 비해 자기결정권이 미약한 약자의 입장일 수 있는 상황에서 문제 상황의 해결을 위해 청소년 세대가 선택한 방법으로서의 연대를 논하는 것은 의미를 지닌다. 기후 위기 재난 상황의 현실에서, 작품 속 청소년들은 통제받고 억압받는 대상에서 나아가 그러한 비주체성을 넘어 청소년 세대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이들로 자리매김할 것을 요구받는 존재가 된다. 즉 최근의 청소년소설 작품들을 통해 극한 재난의 현실에서 주체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청소년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과정을 탐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이앤 듀마노스키(2011)는 『긴 여름의 끝』에서 이상 기후 시대에 접어든 우리의 삶이 이전의 그 양식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의 진입에 해당하는 것임을 이미 살핀 바 있다. 그는 이제 수년 뒤 우리 아이들과 그 다음 세대의 아이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들은 우리가 만들어놓은 격랑을 뚫고 위험한 길을 가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심지어 우리가 의지했던 안락하고 친숙한 세계의 문은 이미 닫혀버렸으며 지구온난화를 예방하거나 기후 위기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이상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전인류적 차원의 주요한 문제 앞에서 냉철한 판단과 실행력은 모두에게 여전히 필요하며, 종말이나 인류 멸종만이 유일한 미래라는 식의 체념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면서도 기술이나 자본으로 세계를 얼마든지 구원할 수 있다는 지나친 낙관주의도 경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에 따라 재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어떠한 방향성을 보이게 될 것인가에 대한 성찰은 다만 성인 독자층만을 위한 몫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청소년소설의 주 수요층이 될 수 있는 청소년 독자들이 미래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존재라는 점을 고려할 때, 심각한 기후 위기의 도래라는 문제는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역시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더해 자본의 격차와 같은 문제들이 실제적으로 재난의 시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재난은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과정이며, 애초의 자연적 현상으로 촉발된 것이라 하더라도 재난 이전과 이후의 현상은 매우 사회적인 것이다(존 C. 머터, 2016). 사회적, 경제적 차원에서의 재난으로 기후 위기 시대의 도래에 대하여 접근하지 않는다면 후속 세대인 청소년들의 삶은 더욱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될 수 있다. 최근 발표되는 많은 청소년소설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기후 위기의 한 중요한 요소로, 이상 기후의 홍수 서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 흥미롭다. 홍수 서사는 사실상 가장 극한의 상황을 제안하는데, 세계의 모든 것이 물에 잠겨 인간이 커다란 상실 앞에 마주한 순간 이 세계의 민낯이 비로소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존재 가치 증명이나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이 연구에서는 최근 발표된 장편 단행본 청소년소설 작품들을 대상으로, 그와 같은 홍수 서사의 양상과 의미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탐구하고자 한다.
본고의 논의는 단요의 2022년작 『다이브』, 설재인의 2023년작 『범람주의보』, 장은진의 2023년작 『디어 마이 버디』 등 세 편의 장편소설을 연구 대상으로 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홍수 속 물에 잠긴 세계에서의 청소년 주체들의 고민과 선택에 대하여 성찰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연대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Ⅱ. 포스트휴먼 시대 기계-인간의 기억과 연대 - 단요, 『다이브』
단요 작가의 장편소설 『다이브』(2022)에서는 2057년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가 세상을 뒤덮어 물에 잠긴 세계를 살아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근미래 시대 기후 위기로 세계의 모든 얼음이 녹아버리자 인류는 그러한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높은 댐을 세운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멈추지 않았던 전쟁으로 인해 결국 댐이 무너지고 15년 전 대한민국 서울은 완전히 물에 잠긴 도시가 된다.
고립되고 가난한 시대였다. 2010년대 초중반부터 시작된 저금리 기조와 대규모의 양적 완화는 세계 경제에 잠시나마 활력을 불어넣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효력이 다하고 말았다. 대공황을 거치고 기나긴 침체의 늪을 빠져나오자마자 기후학자들의 예언이 사실로 닥쳐왔다. 거의 모든 나라가 수몰을 막기 위한 토건 사업에 뛰어들었다. 건설사들의 주가가 오르는 동안 모두의 삶은 빠르게 피폐해졌다. 인천국제공항과 광저우의 거래처와 하노이의 공장이 물에 잠겼고 글로벌 공급 체인은 구시대적인 농담이 된 지 오래였다.
혼란스럽고 끔찍한 시대였다. 바다는 날로 높아졌으며 해일과 폭풍우가 해안가의 원전들을 강타했다. 중화연방에서는 싼샤 댐이 무너지면서 수천만이 급류에 휩쓸렸다. 유럽은 수몰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에두르는 거대한 댐을 건설했다. 남부 뭄바이의 언덕들은 섬으로 변했고 원래부터 섬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났다. 수억 명의 난민이 바다를 가로지르다가 땅에 닿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는 동안 남은 땅들은 말라붙고 갈라졌다.
인간은 너무 많고 땅은 너무 부족한 시대였다. 메마르거나 가라앉지 않은 땅,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 무언가를 캐낼 수 있는 땅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탄소 배출권과 신용등급과 경제 제재는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는 거짓말이 되었으므로 오직 땅뿐이었다. 거대한 나라들이 접경 지역을 두고 맞붙은 것은 필연이었고 미사일이 허공을 가르는 것도 당연했다.2)
모든 것이 물에 잠기게 된 대홍수의 재난 이후 모든 사람들은 문명과 사회의 파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원시적 생활로 회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도, 행정, 가족 등 기존의 모든 것들이 무화되고 소멸된 세계에서 특히 아이들은 각자 자신의 특기와 능력을 토대로 물꾼이 되거나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는 등 어른들에게 의지하지 않는 새로운 삶의 형태에 적응해간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보호하고 양육한다는 통상의 개념조차 재난의 상황 속에서 이미 사라지게 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가족’이라는 혈연 공동체의 울타리로 부모가 아이들을 길러내던 시스템마저 완전히 붕괴해버린 것이 작중의 현실이다. 작품의 주인공 ‘선율’은 노고산에 살면서 물속에 뛰어들어 물건들을 구해오는 물꾼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남산 물꾼인 ‘우찬’과 시비가 붙어 물속에서 더 좋은 물건을 구해오는 사람이 상대의 영역을 빼앗기로 하는 내기를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선율은 물속에 잠들어 있던 기계-인간 소녀 ‘수호’를 건져낸다.
― 근데 이것들, 진짜 사람일까?
선율은 중얼거리듯 질문을 던졌다.
― 기계겠지. 고장 난 기계 인간이 한두 개도 아니고. 이렇게 멀쩡한 건 거의 없지만.
― 걔네들은 누가 봐도 쇳덩어리잖아. 그런데 얘들은 살갗이 있다고. 머리카락도. 모습도 다 달라. 이상하지 않아?
― 평범한 사람이 숨도 안 쉬고 밥도 안 먹고, 여기에 몇십 년씩 있는 건 안 이상하고? (다이브, 12쪽)
과거 수십 년 전 ‘인간’이었던 시절의 수호는 큰 병을 앓아 결국 죽음을 맞게 되었고, 이후 수호를 잊지 못하는 그녀의 부모는 수호의 기억을 이식한 기계-인간 수호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부모의 기대와 기쁨을 위해 ‘만들어진’ 기계-인간 수호는 점차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이유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고, 말 잘 듣는 딸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삶의 목표이자 기능의 전부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진다.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빚던 첫 번째 기계-인간 수호가 옥상에서 뛰어내려 스스로를 파괴시키는 죽음의 형태를 선택했을 때, 그의 부모는 곧바로 두 번째 기계-인간 수호를 만들어 또다시 인간 수호의 기억을 심어 놓았으며, 선율과 동료들이 폐허가 된 서울의 깊은 물 속에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건져낸 것이 바로 그러한 두 번째 기계-인간으로서의 수호였던 것이다.
이러한 기계-인간 수호의 존재를 둘러싸고 이 소설에서는 기계-인간의 특수성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이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작품은 이 과정에서 로지 브라이도티(2017)가 말한 바 있는 변형과 공생의 관계가 재난의 삶에서 의미 있는 질문이 되어야 할 것임을 시사한다. 선율은 우연한 계기로 만나 교류하게 된 수호를 ‘기능’이나 ‘필요’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바라봐주는 사람으로 함께 하며 끝까지 곁에 남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넘어 인간과 함께할 모든 존재와의 사이에서 이기적 소유, 혹은 관계 맺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믿음은 이 작품의 주요한 주제 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야스퍼스가 밝힌 바와 같이 실존적 교제의 영역에서 타자와의 관계 맺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각과 상통한다(강갑회, 2002). 타자 및 세계에 대한 암호해독으로서의 주체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청소년 인물들의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변형된 신체에 대한 자각은 동시에 죽음에 대한 인식과 이어진다. 신체 변형자와 함께 공존하는 과정은 필요가 아니라 존재성 자체로 함께 해야 한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런 순간이 뭉쳐 구체적인 의심이 된 날부터 수호는 자신의 기능이 무엇일까 자문하기 시작했다. 항상 웃고, 씩씩하게 돌아다니고, 말을 잘 듣는 것. 화도 싫증도 내지 않고 영원히 햇살 아래에서 반짝이는 것. 미래도 과거도 묻지 않고 모든 시간에서 한결같은 것. 그건 딸의 기능이 아니었고 사람의 기능도 아니었다.
거기에서부터 다시 질문이 늘어났다. 절전 상태에 들어갔다 나오더라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코드를 고쳐서 버그를 수정하듯 내 마음도 그렇게 바뀌는 게 아닐까. 불만은 한순간에 잊고 무엇이든 좋게만 받아들이도록. 어쩌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부터가 버그일지도 모른다. 착한 딸 기계가 오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다이브, 156-157쪽)
수호의 부모가 죽은 딸을 대신해 기계-인간 수호의 존재를 탄생시키게 된 계기는 인간 시절의 수호가 갖고 있던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수호의 ‘기억’을 갖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기계-인간 소녀는 존재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기억의 기원을 생각해보면, 그 시작은 바로 ‘현재’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가 과거를 “되불러” 와 그에 “개입하고” 그렇게 하여 그 속에 현재 행위의 목적에 적절하고 좋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를 기대하게 된다(하랄트 바인리히, 2004). 그렇게 볼 때 ‘기억’의 현재적 의미를 기계-신체로 구현하고 있는 수호의 존재성은 상당히 복잡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수호의 모든 기억은 과거 속에서 구축되었지만, 이미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현재에 와서 그의 신체가 기계의 동력을 빌려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선율은 그 대답을 곱씹었다. 여기에서 사람 채수호와, 파일이 된 채수호의 기억과, 배터리를 달고 움직이는 채수호의 차이를 깊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수호 자신뿐인 듯했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더 물어야 할 게 있지 않나 싶으면서도 기계 인간 수호의 남은 삶에 있어서는 그게 바로 정답인 것 같았다. 기분 나쁜 복제품이 된 채 우울에 잠기기보다는. 과거에 얽매인 채 뭐가 진짜 자신인지 하염없이 묻기보다는.
눈이 마주치자 수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장난기 어린 곡선은 자신은 그냥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까 불쌍하게 여길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까 받았던 인상처럼, 태연한 척하려 애쓰는 건지도 몰랐지만 선율은 그 웃음이 좋았다. (다이브, 60-61쪽)
과거의 기억만을 갖고 기계로 재탄생한 신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기계-인간이 된 수호 본인이 가장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자기 스스로를 불쌍한 존재로 여기기보다는 직면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다가오는 수호의 태도야말로 재난이라는 이름으로 상상되는 위기의 삶에서 젊은 주인공들이 보일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향성의 하나일 수 있을 것이다. 재난의 형태로 갑작스럽게 닥쳐온 불행 앞에서 청소년 인물들이 좌절과 절망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문제에 맞서 대응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나머지 어른들은?”
“예전에 다른 곳으로 갔어.”
“애들을 다 버리고 간 거야? 그래도 돼?”
“아니, 저 애들은 여기가 더 좋으니까 여기 남은 거야. 삼촌이 좋아서든, 내가 좋아서든, 지오가 좋아서든 간에. 노고산에 있는 게 남산에서 사는 것보다 더 좋으니까. 당연히 지금이라도 남산에 가고 싶다면 그럴 수 있어. 구룡산에 갈 수도 있고.”
“부모님들한테 허락은 받았고?”
선율은 문득 수호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느꼈다. 그건 예전을 기억하는 사람과 그 이후만을 살아온 사람의 차이였다. 지금의 서울은 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남편이 없는 아내. 아내가 없는 남편. 아이가 없는 부부. 부모가 없는 아이. 어느 하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중략) 그 사실을 설명하자 수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면 반대로, 애 키우는 게 버겁거나 귀찮아지면 버리고 갈 수도 있다는 거야?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선율은 귀찮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고 답했다. 누가 누구의 밑에서 자라느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 어린 사람이, 그리고 산의 이름이 있을 뿐이었다. 그 느슨하면서도 끈끈한 그물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의 삶을 함께 만들어 나갔다. 수호는 낯선 세상을 씹어 삼키기 어려운지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다이브, 63-65쪽)
어른들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수호에게 2057년을 살아가는 아이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예전에 다른 곳으로” 갔다고 말해준다. 아이들을 버리고 어른이 떠난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려운 수호에게 역시 “애들은 여기가 더 좋으니까” 여기에 남은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아이들의 몫이다. 가족이나 혈연으로 대표되는 기존 세계의 끈끈한 연대가 이미 소멸된 자리에서 혈연도 지연도 아닌 오로지 자신들의 선택과 의지만으로 함께 하는 성격의 연대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전혀 의지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힘으로 생존을 이어가야 한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힘으로 갈등을 중재하거나 극복해야 하며 더 나은 관계를 위한 노력도 자신들의 힘으로 수행해야만 한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아이들 상호 간의 연대가 더욱 공고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이 소설의 독특한 지점이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현존하는 사회, 경제, 정치, 그리고 젠더 체계를 결합시키고 입법화하는 데 절대 필요한 하나의 유일한 수단으로 여겨져 왔다. 물론 가족가구들은 어떠한 형태의 사회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데올로기는 그렇지 않다. 반드시 그러한 형태여야 한다는 이상적인 가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가족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논의가 진행될 때 주로 비판되었던 것은 이혼, 강간, 근친상간 등의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이데올로기가 도전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이 현존하는 사회 경제적ㆍ정치적ㆍ가부장적 체계의 정당성에 의심을 제기할 수 있는 추동력을 얻게 된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규격화된 인식을 넘어설 수 있을 때 남성, 여성, 아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의 실체를 재고하고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통해 기존의 상황보다 평등하고 서로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할 수 있다(다이애너 기틴스, 1998).
“네가 나랑 다시 약속해 줬으면 좋겠어. 다른 산에 가지도 않고, 강원도에 가지도 않고, 계속 여기 있겠다고. 적어도 내가 좋고 이 산이 좋은 동안에는. 헤엄을 잘 친다거나, 공기탱크가 없어도 잠수를 할 수 있다거나 하는 이유 때문은 아니야. 그냥 노을을 보면 네 생각이 나서, 앞으로도 줄곧 그럴 것 같아서 그래. 너 없이 해가 지면 거기에 빈자리가 남을 것 같아서.”(다이브, 175쪽) (강조: 인용자)
실제로 작품 속 청소년 주체들은 완전히 붕괴된 가족 제도의 상황 속에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상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다. 자신들의 관계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수호에게 선율은 위의 인용과 같이 단호하게 요청한다.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가 여전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밝히는 작가는 청소년 인물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한 연대에 대하여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맞닿고, 채워지고, 다시 하나가 되는 느낌. 혹은 기쁨.”(다이브, 190쪽)이야말로 모든 것을 집어삼킨 홍수의 시대에서 가장 크게 지켜내야 할 가치라는 주제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호가 기계-인간의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율을 비롯한 동료들은 그녀를 기계적 기능으로만 판단하고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존재가 되고 싶기 때문에 옆자리에 있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가족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기존의 모든 관계, 제도의 양태들이 철저히 파괴되어버린 재난의 삶 속에서 인간 아닌 존재와의 공존까지 가능하게 한 성숙한 청소년 인물들의 모습은 그러한 진지한 성찰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Ⅲ. 거대자본의 양극화와 자본전쟁의 재난 - 설재인, 『범람주의보』
설재인의 장편소설 『범람주의보』(2023)에서는 비가 그치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끝없이 내리는 비를 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사람들은 최고의 대기업 ‘누비스’ 사에서 개발한 워터프루프 시스템을 비싼 가격으로 구매하여 생활하고 있다. 영원히 멈추지 않는 비라는 재난 속에서도 이제 손으로 우산을 받쳐 쓰는 사람들은 거의 없으며, 워터프루프 시스템을 자신의 신체에 장착한 사람들이 손쉽게 버튼을 터치하여 끝없이 내리는 비를 맞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 당연해진 사회에서 ‘누비스’ 사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만 갈 뿐이다. 누비스가 있으면 피부 위에 배리어를 씌워 줄 수 있고, 이는 자본을 통해 기후 위기의 문제를 회피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인 것이다.
부유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주인공 ‘혜인’은 당연한 듯 누비스를 이용해 비를 맞지 않고 비싼 일광욕 프로그램을 수시로 받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한편으로, 비를 피하지 않고 다리 밑에서 거지처럼 생활하는 ‘기행’을 일삼는 자신의 할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점차 할아버지의 기행 뒤에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되면서 거대 기업이 자본의 힘으로 은폐하고 있는 세계의 이면에 대해 깨닫게 되고, 그들이 외면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버리지 않는 선택의 길로 나아가기로 한다. 부유한 사람들이 누비스 사의 워터프루프 시스템을 구매하여 아주 편리하게 비를 피하고 있을 때, 그 과정에서 발생한 빗물 쓰레기들은 한 군데로 모여 아무도 모르게 가난한 이들이 살고 있는 ‘통협동’이라는 동네로 흘러가도록 설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통협동 주민들은 매우 불결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평생을 고통받으며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엄마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부터 날씨가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봄과 가을이 사라졌다. 여름엔 비가 많이, 아주 많이 왔다. 편의점의 물건과 식당의 입간판과 차와 사람이 떠내려가는 일이 잦았다. (중략) 남은 것은 비가 그치지 않는 하루하루뿐이었다.
멈추지 않는 비는 모두의 삶에 검푸른 곰팡이를 피웠다. 저지대의 주민들과 강우량에 민감한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빈민이 대거 생겼고 물이 범람해 땅은 그만큼 좁아졌다. “햇볕마저 없으니 마음까지 썩었단다”라고 엄마는 이야기했다. 그러나 나는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닌 자연적인 햇볕을 마주한 적은 없어서 그게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했다.
누비스의 워터프루프 시스템은 혁명이었다. 다만 보편화된 지금에 이르러서도 서비스 구독료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만만치 않다. 폭우가 내릴 때 손목을 톡톡 친 후 웃으며 그대로 걸어 나가느냐, 아니면 커다란 가방 속을 한참 헤집어 간신히 우산을 꺼내 드느냐의 차이로 사람들은 서로를 쉽게 평가할 수 있었다. 그건 자동차의 엠블럼이나 상의 목 뒤의 라벨, 혹은 손톱이 정리된 모양새 같은 것으로 가늠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즉각적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매일같이 지겹도록 비가 오니 말이다.3)
이처럼 ‘누비스’로 상징되는 거대 자본 시스템을 통해 재난 상황에서의 안전한 삶을 구현할 수 있다는 시각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의 근원적 지점이다. 한때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나 소설 작품이 묘사한 재앙들은 다른 삶의 방식이 출현할 수 있는 서사적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으나, 이제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 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우세한 상황이다(마크 피셔, 2024). 영원히 지속되는 비, 홍수라는 재난이 삶을 덮쳐도 자본주의는 그러한 특수한 상황마저 흡수하고 재조직해 스스로의 덩치를 키워가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그렇게 거대한 몸집을 계속해서 불려가고 스스로의 힘을 키워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구성원들이 그것에 어떤 식으로든 협조하고 기여하는 과정을 반복해 왔기 때문에 비인격적 구조를 끝없이 재생산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범람주의보』는 기성세대인 부모의 영향력을 아직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는 청소년 주체들이 스스로의 자각으로 그러한 비인격적 자본 재생산의 구조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는 지점에 대해 모색하고 있다. 혜인으로 대표되는 청소년 인물들이 기존의 왜곡된 인식이나 제도 속에 어떠한 균열의 지점을 예비할 수 있는 순간이야말로 이 작품이 가장 희망적으로 그리고 있는 지점인 것이다. 마크 피셔의 지적처럼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무한히 가변적이고 어느 순간에도 스스로를 재구성할 수 있는 어떤 현실에 우리를 예속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 인물들이 그러한 현실의 작은 균열을 찾아낼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데에 이 작품은 큰 의미를 두고 있다.
비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 보송보송한 삶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 수 있으려면 어디선가 더 많은 습기와 오수를 감당해야만 한다. 그리고 꾹 누르면 결국 터지는 물풍선은, 혹은 여기저기 쓸려 낡고 마모된 고무 호스는, 전조 증상 없이 어느 날 모두의 얼굴에 물벼락을 튀길 수밖에 없다. (범람주의보, 197쪽)
오물과 오수를 한번에 모아 손쉽게 처리해버릴 수 있는 공간인 ‘통협동’의 존재에 대해 그러한 폐기물 생산의 주체인 거대 기업을 비롯해 기성 사회의 그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만 살고 있는 마을의 피해를 아랑곳하지 않는 시스템의 문제와 관련해, 할아버지를 통해 우연히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된 혜인을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그러한 철저한 무관심이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이기적 욕망의 모습이다. 자신의 부모님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어른들이 보여주는 태도가 그러한 것이다. 심지어 혜인의 부모는 자신의 딸이 통협동의 아이들과 만나서 더러운 것에 오염되기라도 할까 그것만 걱정할 뿐 정작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고통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아웃사이더’의 존재일 뿐, 자신들의 삶에 절대 침범해 들어와서는 안 되는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지그문트 바우만, 2015). 이렇듯 그들 통협동 주민들의 존재를 자신들과 철저히 분리한 채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은 시민들 자신의 의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 상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만들고 있다.
그렇기에 통협동 주민들의 존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미 잊혀져 있는 상태이다. 그들의 존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면 홍수 속에서도 안전한 삶을 상징하는 ‘누비스’ 시스템은 더 이상 안락하고 편안하기만 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통협동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온몸에 붉은 반점을 갖게 되고 치유할 수 없는 온갖 질병에 고통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아이들은 통협동에 따로 모여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는 한 다른 대다수 시민들의 편안한 삶이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사실인가를, 혜인은 깨닫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은 경제가 사람을 배제하는 주된 원인이라는 데 있다. 이 작품은 재난 속에서도 여전히 모든 개인들이 가족 속에서조차 고립되고 상호 대립되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사회, 다른 사람을 이용해 살아가도록 종용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연대의 영구적 결핍을 대가로 살아남고 번영한 사회 속에서 기성세대의 많은 어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새로운 연대란 오직 계약 형식에 의한 거래일 뿐이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협상에 의해 거래될 수는 없을 것이다(모리스 고들리에, 2011). 협상과 계약에 의한 것이 아닌 다른 방식의 연대를 발견해내는 것은 혜인과 친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목표가 된다.
공동체 내에서 서로가 의미 있는 타자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취약성을 사유에서 배제하는 일, 그것을 추방하는 일, 다른 모든 인간적 고려를 무시하고 우리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기도 하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따라 “너 없이 나는 누구로 존재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유대관계 중의 일부를 잃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타자와 사회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너’를 잃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나’ 역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주디스 버틀러, 2021).
현실 속에서 개인은 무척 작고 약한 존재이지만 더 이상 침묵하는 혜인이를 상상할 수 없다는 데서 희망을 보아야 한다는 작가의 말(설재인, 2023)은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청소년 주체의 실천적 역량과 그에 기반한 연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드러내준다. 혜인이와 같은 청소년 인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작품의 문제 제기는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청소년 주체들의 연대와 저항이 강조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약자라 할 수 있는 노년 인물들의 희생이 당연스럽게 요청되는 것은 다소 우려스러운 지점이다. 혜인이 자신의 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노인센터의 할아버지 자리에 할아버지의 예전 직장 동료인 ‘수향’ 씨를 대신 두고 오기로 하는 계획은 쉽게 공감하기 어렵다. 이는 작품에서 약자로 인식되는 ‘통협동’ 주민들, 즉 가난하고 돈 없는 이들의 존재에 대해 깊이 연민하고 공감하기를 유도했던 시선과 그에 따른 혜인의 태도에 비해 매우 이질적인 것이다. 늙고 병든 수향 할머니의 존재를 너무 쉽게 죽음으로 향하도록 버려두는 결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재난으로 상징되는 고통의 상황에서 우리가 어떠한 지점까지 서로의 손을 맞잡고 서로에 대한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고민해보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제기된다. 따라서 작품에서 제기한 청소년 주체들의 연대 의식뿐만 아니라 병들고 약해진 노년 인물의 삶의 주체성에 대한 부분까지도 더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너’를 잃는 것은 그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통해 용기 내어 손잡는 실천 행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욱 섬세한 고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Ⅳ. 희망에 대한 상상과 사랑의 동력 - 장은진, 『디어 마이 버디』
장은진의 장편소설 『디어 마이 버디』(2023)에서도 끝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온 세상이 물에 잠겨 버린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형상화된다. 이상 기후의 극한에서 세상은 마침내 물에 잠겨 버렸고 그러한 대홍수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고층 건물의 꼭대기로 향하며 하루하루 지상에서 멀어져갈 수밖에 없다. 열일곱 살 ‘세호’를 중심으로 세호의 어린 동생 아홉 살 ‘세아’와 아기 고양이 루나, 같은 고층 건물에서 피신해 살고 있는 혜미, 샘 아저씨, 란희 누나, 윤씨 아저씨 등 각각의 인물들은 고통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어린 세아는 피신 과정에서 어렵게 구해 온 그림책들에서 이미 군데군데 찢겨져 나간 페이지의 볼 수 없는 그림들을 상상하여 모두에게 읽고 설명해주는데, 이러한 세아의 행위를 통해 그림의 이미지를 비롯해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절망에 빠진 주변 인물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이상 기후로 인해 상실된 기쁨과 희망의 세계는 그림책의 찢어진 삽화 페이지와 같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희미한 흔적 혹은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어린 세아는 그러한 흔적과 이미지에 대하여 상상하기를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가족과 동료들에게 큰 힘을 불어넣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살아남았으면 그것만으로도 모두 친구가 돼야”(103) 한다는 어린 세아의 말은 이 작품 전체의 주제 의식을 함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몰아치는 물의 재난 속에서 가장 어리고 여린 세아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또한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을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걱정 마라. 내가 있으니까. 네 옆에는 항상 내가⋯⋯.”
“아저씨.”
“우린 버디잖니.”
버디.
“난 두렵지 않다. 내 옆에는 네가 있으니까.”
“그렇죠. 전 아저씨 버디니까요.”4)
다이빙을 통해 삶에 대해 배워가는 주인공 세호에게 있어 ‘버디’, 즉 바닷속에서 파트너가 되어 실질적으로 서로의 목숨을 구해줄 수 있는 둘도 없는 짝꿍의 존재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인생의 동반자라고 할 수 있다. 학교폭력에 고통받으며 제대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세호에게 다이빙은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일깨워준 것이었다. 끝없는 입시 경쟁에서의 낙오와 왕따 등 고통으로 점철된 것만 같았던 세호의 생활에서 다이빙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위협이나 경쟁의 존재가 아니라 지켜주고 함께 하는 존재인 ‘버디’가 될 수 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홍수가 덮친 세계에서 다이빙은 실질적으로 세호의 능력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하는 방법이 되었다.
다이빙에서 가장 중요한 장비는, 어깨에 멘 무거운 공기통보다 더 중요한 장비는 바로 버디다. 나의 또 다른 공기통, 버디. 물속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호흡 기체가 떨어졌을 때 자기 숨을 나눠 주고 나를 물 밖으로 데려다줄 유일한 사람. 생명줄. (디어 마이 버디, 61쪽)
다이빙을 통해 알게 된 ‘버디’의 존재 덕분에 세호는 자신의 삶에서 누군가와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많은 청소년소설 작품들에서 경쟁의 고통과 청소년 주체들의 번민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재난과 연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편으로 경쟁의 삶이 청소년 인물들을 어떻게 고통받게 하는가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 재난 이전부터 경쟁과 학교폭력 등은 세호의 삶을 괴롭히고 있었고, 그러한 문제들을 쉽사리 벗어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을 온통 뒤덮은 물의 재난 속에서 비로소 세호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재난 서사의 일반적 원리를 비교적 충실히 차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다 깊은 곳에서 가져온 마음의 평화와 여유는 악몽 같던 학교생활을 이어가게도 해 주었다. 엄마의 허락에도 나는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 공부는 꼴등이어도 다이빙은 1등이었으니까. 학교에서는 경쟁하라고 가르치지만 다이빙은 경쟁하지 말라고 가르치니까. 학교에서는 속도를 내라고 부추기지만 다이빙은 느린 속도로 버디와 함께 나아가라고 하니까. 서로 보살피고 도우라고 하니까. 느린 움직임으로 누군가를 도우면서도 1등을 할 수 있으니까.
다이빙은 이기려는 경쟁심보다 져도 괜찮은 보살핌을, 바쁜 속도보다 차분한 느림을 지향하는 세계다. 세상이 물속이라면 우리는 모두 그런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라고 물에 가둬 버렸을까.”
혜미가 물에 잠긴 도시를 아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어떤 빌딩은 며칠 전까지 있었던 창문 한 줄마저 사라져서 아예 보이지 않았다.
“잠기니까 사라져 버리긴 했어. 경쟁도 속도도, 꼴등도 1등도. 서로 도와야만 살 수 있잖아. 우린 지금 다이빙의 세계를 살고 있는 건지도 몰라.”(디어 마이 버디, 117-118쪽) (강조: 인용자)
이렇듯 작품의 청소년 인물들은 기후 위기로 인한 재난 상황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삶에 대해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모든 것이 물속에 잠겨 버린 세계에서는 이제 더 이상 1등도 꼴등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때 청소년 인물들이 맞이한 그러한 성찰의 기회는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해 수반된 대홍수의 재난으로 인해 매우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갑작스럽게 끝날 수도 있다는 암시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무한히 지속되는 기후 위기가 아니라 언제 어떠한 사유로든 곧 끝날 가능성이 높은 기후 위기의 재난이라는 설정, 이러한 다소 낭만적인 전망은 이 작품의 독특한 지점이기도 하다. 실제로 작품에서는 위험과 위기를 겪으며 주요 청소년 인물들이 성숙한 인식에 도달한 후 거짓말처럼 물에 잠긴 세계의 수위가 실제로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기후 위기의 극복 가능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이 홍수로 물에 잠기기 전, 세호가 속한 집단, 즉 가족과 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은 끝없는 경쟁이었고 그러한 경쟁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세호는 스스로를 낙오자로 여겼던 것이지만 ‘져도 괜찮은 보살핌’이 존재할 수 있는 다이빙의 세계에 입문한 후 비로소 그러한 열패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보살핌은 서로에 대한 강력한 책임감에 수반하고 있다. 물속의 버디들이 서로를 책임지고 챙겨 주어야 서로의 목숨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작품 내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인 어린 ‘세아’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기 고양이 루나를 구하고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이지만 세아는 죽음 앞에서도 루나를 구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이렇듯 타자에 대한 책임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이라는(라이너 촐, 2008) 가장 근본적인 연대 개념에 대해 이 작품은 깊이 천착하고 있다.
“아무리 비가 많이 내리고, 요란하게 내리고, 오래 내려도 기다리면 멈추는 날은 온단다. 무슨 일이든 끝이 있지. 어떤 식으로든 끝날 거야. 기다리면, 끝이 올 거야.”(디어 마이 버디, 140쪽)
따라서 이 작품의 청소년 인물들이 상실과 죽음을 경험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지점이다. 결국 그러한 희망의 끝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가 혼자의 힘으로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버디’라는 인생의 동반자 혹은 친구를 끝없이 찾아 헤매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점에 대한 자각이다. 세호와 동료들은 물속에서 버디의 존재를 의지하며 서로를 지켜줄 수 있었듯이, 물 밖에서도 혼자 힘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서로가 서로에게 버디가 되어주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계속해서 인식해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이처럼 버디는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작은 아기 고양이를 위해서 어린 세아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질 수 있는 것이다.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결심과 서로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혹은 사랑으로 묶인 단단한 연대만이 재난과 위기의 삶 속에서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 있으리라는 낭만적 전망은 이 작품 전체를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특히 인간이든 아니든 이미 피난처 없는 난민으로 가득한 지구에서 함께 잘 살고 잘 죽는 것을 배우는 실천을(도나 해러웨이, 2023) 보여준 것은 가장 어린 세아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희망의 이미지를 상상하는 법을 보여주었던 세아는 자신을 희생하는 함께-되기의 방법까지 제시하면서 상실의 슬픔과 함께함의 소중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살자.”
아저씨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말했고, 혜미도 아저씨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살 것이다. 엄마, 아빠, 세아가 살아 보지 못한 시간까지 살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나중에 만나면 다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들이 심심해하지 않을 만큼, 그들이 살아 보지 못한 시간만큼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하고 또 해 줄 것이다. 이야깃거리를 많이 만들어 가기 위해서라도 아주 오래 살 거라고, 감자 먹는 사람들 자리를 보며 다짐했다. (디어 마이 버디, 195-196쪽)
세아가 떠난 뒤 세호와 동료들은 슬픔을 이겨내고 살아남는 것에 대해 다짐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세아가 전해주었던 희망의 이미지에 대한 상상력이 서로를 지켜주는 진정한 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그러한 돌봄과 사랑의 원동력 자체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청소년 독자들이 그러한 질문에 대해 의식하고 답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게 하는 것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목적이라 할 수 있다.
Ⅴ. 결 론
지금까지 기후 위기로 인한 대홍수의 시대, 물에 잠긴 도시에서 재난 상황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청소년 주체들의 고군분투에 관련한 2020년대 청소년소설의 상상력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최근 청소년소설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이러한 홍수의 상황에 대한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기후 위기의 문제가 대표적으로 집약된 형태로서 완전히 물에 잠겨 버린 서울, 대도시의 삶을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 적극적 실천과 저항으로 이어질 수 있는 청소년 주체를 발견해나가는 과정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후 위기 문제에 대한 성찰의 과정을 통하여 청소년소설 장르의 시의성과 동시대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에 본고에서는 2020년대 이후 발표된 단요의 『다이브』(2022), 설재인의 『범람주의보』(2023), 장은진의 『디어 마이 버디』(2023) 등의 장편 청소년소설 작품들을 대상으로 홍수 속 연대의 의미와 양상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단요의 장편소설 『다이브』에서는 수십 년 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기계-인간 소녀 수호의 존재를 둘러싸고 재난의 세계에서 재구성되는 새로운 청소년 연대의 모습에 대해 그려냈다. 설재인의 장편소설 『범람주의보』에서는 거대 자본에 의해 홍수의 재난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 이면에 그러한 편리를 위해 희생된 약자들의 모습이 숨겨져 있었음이 나타난다. 장은진의 장편소설 『디어 마이 버디』에서는 물속에 잠긴 세계에서 비로소 강력한 책임감으로 서로를 지켜주는 연대가 형성될 수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기후 위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청소년소설의 서사에서는 진지한 문제의식과 청소년 주체들의 당당한 대응 방식을 구현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청소년 사이의 연대 문제에 대하여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으며, 재난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그것은 특수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본고의 분석 대상 작품들은 홍수 속 물에 잠긴 세계에서의 청소년 주체들의 고민과 선택에 대하여 성찰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연대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품 속에 형상화된 기후 위기 재난 상황의 현실에서, 청소년 인물들은 통제받고 억압받는 대상에서 나아가 그러한 비주체성을 넘어 청소년 세대의 삶의 문제에 대하여 더욱 적극적인 선택과 실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Acknowledgments
이 논문은 2024년도 (사)한국청소년문화연구소의 청소년문화포럼 연구비지원 논문공모에서 연구비를 지원 받아 수행된 연구임
Notes
References
- 강갑회 (2002). 야스퍼스의 실존적 사귐에 관한 연구. 대동철학, 16, 99-118.
- 김미현 (2019). 21세기 재난소설의‘비장소(Non-Place)’와 경계 사유-편혜영의 재난소설 3부작을 중심으로. 이화어문논집, 49, 186-207.
- 나병철 (2011), 청소년 환상소설의 통과제의 형식과 문학교육. 청람어문교육, 44, 363-395.
- 단 요 (2022). 다이브. 창비.
- 박경희 (2017). 한국 청소년소설과 청소년의 성장 담론. 역락.
- 선주원 (2019). 청소년소설,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박이정.
- 설재인 (2023). 범람주의보. 자음과모음.
- 손민달 (2023). 인류세 담론의 의미와 한계. 한민족어문학, 102, 219-255.
- 오세란 (2010). 청소년소설의 장르 용어 고찰. 아동청소년문학연구, 6, 150-176.
- 오세란 (2015). 청소년문학의 정체성을 묻다. 창비.
- 이수진 (2014). 드러난 권위와 숨겨진 권위 사이-청소년문학의 디스토피아적 비전. 현대영미소설, 21(1), 277-303.
- 장은진 (2023). 디어 마이 버디. 자음과모음.
- 도나 해러웨이 (2023). 최유미 역.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 라이너 촐 (2008). 최성환 역. 오늘날 연대란 무엇인가. 한울.
- 로지 브라이도티 (2017). 이경란 역. 포스트휴먼. 아카넷.
- 마크 피셔 (2024). 박진철 역. 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 리시올.
- 모리스 고들리에 (2011). 오창현 역. 증여의 수수께끼. 문학동네.
- 다이애너 기틴스 (1998). 안호용ㆍ김흥주ㆍ배선희 역. 가족은 없다-가족이데올로기의 해부. 신사.
- 다이앤 듀마노스키 (2011). 황성원 역. 긴 여름의 끝. 아카이브.
- 존 C. 머터 (2016). 장상미 역. 재난 불평등. 동녘.
- 주디스 버틀러 (2021). 윤조원 역.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 지그문트 바우만 (2015). 한상석 역. 모두스 비벤디-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 후마니타스.
- 하랄트 바인리히 (2004). 백설자 역. 망각의 강 레테. 문학동네.